[논픽션 리뷰] 어느 모험의 기록
배고픈 하이에나
Mar 27,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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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로 태어나서>, 한승태

'해보니' 기사를 믿지 않는다. 지금은 기자로 살지만 내 첫 직업은 방송사 시사교양다큐 PD였다. 선배들에게 가장 먼저 배운 건 "다큐를 제대로 찍으려면 한 몇주는 파리처럼 붙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루이틀 옆에 있어봐야 어차피 촬영 대상은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하므로 판에 박힌 말 밖에 해주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기자가 직접 배달 라이더가 돼 봤다고? 얼마나 바쁘고 정신없는지, 배달 현장이 어떻게 위험한지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지만 그뿐이다. 연탄을 나르고, 하루 쪽방촌에서 취침했다고? 병영캠프 3일 가 보고 군대가 얼마나 힘든지 깨달았다는 '진짜 사나이' 같다. 싫으나 좋으나 2년1개월(요즘은 1년 6개월이다만)을 지내야한다는 것이 병사 생활의 본질 아닌가.

MBC 예능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의 한 장면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어차피 그 삶은 알 수 없다는 회의론이 아니다. 어떤 세계로 입장하려면 최소한의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법이고 취재의 화폐는 시간이다. 후려쳐서 이룬 거래는 어느 방면에서건 티가 날 수밖에 없다. 기자 출신 작가 장강명은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한 <장강명의 책 한번 써봅시다>(책으로도 엮여 나왔다)에서 체험형 논픽션에 대해 이렇게 썼다. "어떤 일을 고작 한나절 가량 겪은 뒤에 고통을 지나치게 호들갑스럽게 강조하면 역효과가 나리라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거래에 써야 할 시간이 어느 정도 길이여야 하는지 합의된 바는 없지만, '해보니' 수준으로는 턱도 없다는 것을 독자들은 직관적으로 안다.

작가 한승태는 장 작가가 꼽는 '체험형 논픽션'의 모범 사례이다. 장 작가가 정의하는 논픽션은 ‘소설 같은 구성이지만 허구가 아니라 현실을 바탕으로 한 책’인데, 르포르타주를 포함한 체험형 논픽션은 그 중에서도 특별하다. 체험의 특성상 작가나 기자 본인이 주인공 역할을 맡기 때문에 인물(주인공) 설정도 이야기 구조가 제한적이다. "체험 방식의 장점을 살리려면 옆에서 보거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생생한 고백이 나와야 한다. 체험을 하면서 다른 사람이 ‘우와, 진짜 그래?’ 할 정도로 놀라운 팩트나 예상치 못한 느낌들을 부단히 찾아야 한다." '부단한 체험'에서 나오는 '생생한 고백'. 책장에서 나는 한 작가의 책 <고기로 태어나서>를 꺼내어 봤다.

한 작가가 찾은 현장은 대단하지 않다. 세 종의 동물, 닭, 돼지, 개를 기르는 사육장이며, 책의 목차도 '닭고기의 경우', '돼지고기의 경우', '개고기의 경우'로 단순하게 적혀있다. 이들 동물이 비좁은 우리에서 힘들게 자라 잔인하게 도축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매일같이 고기를 씹고 뜯고 맛보던 사람도 한번씩은 사육장 현실을 전하는 기사를 보며 '고기에게 미안하다' '너무 잔인하게 동물을 죽이는 건 지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한 작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생각이 얼마간 틀렸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을 뿐. "내가 축사 안에서 본 것들 가운데 모르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닭장이 있었고 닭이 있었고 똥이 있었고 알이 있었다. 하지만 축사 속에 내가 예상한 대로의 모습을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 작가가 <고기로 태어나서> 서문에 적은 문장이다.

한 작가가 목격한 사육장은 '좁다'는 말로 요약되지 않는다. 케이지는 닭 세마리가 들어가면 꽉 차는 크기이다. 하지만 농장주가 운영비 절감을 위해 한 마리씩 꼭 더 집어넣기 때문에 가장 약한 한 마리가 늘 바닥에 깔린다. 힘없는 닭은 무게에서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뒤척인다. 나머지 셋은 균형을 잡고자 발을 꼭 오므린다. 닭들은 자라면서 케이지에 치여, 혹은 다른 닭의 발톱에 긁혀 털이 뭉텅뭉텅 빠진 채 맨살을 드러내고 피를 흘린다. 그나마 이건 살아남은 닭 이야기다. 크기가 작거나 부리가 휘어진 '약추', 알을 못낳는 수평아리는 태어나자마자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걸러져 자루에 담긴다. 노동자들은 자루를 아끼기 위해 병아리들을 꼭꼭 밟는다.

돼지와 개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개는 전기충격기로 지지고, 농장주의 부인은 덜 자란 놈을 죽이겠다며 돼지의 발(족발)을 잡아 바닥에 패대기친다. 수퇘지는 비린내를 줄이고 육질을 부드럽게 한다는 이유로 거세되는데, 마취조차 하지 않는다. "마취 안하고 그냥 잘라내요?" "이 많은 걸 언제 마취하고 있어? 그냥 하는 거지. 괜찮아." 책을 읽다가 아랫도리가 움찔한 것은 내가 동물이기 때문인가 수컷이어서인가. 불명료한 공감과 달리 살육의 이유는 확실하다. "폐기가 이익이다." '근수'가 많이 나가는 동물은 가치가 있으나,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동물은 팔아서 남는 이문보다 사료값에 따른 비용이 더 크다는 것이다.

출처 : 게티이미지벵크

영양 공급이 부족해 동물들의 몸이 극도로 약해진다는 서술도 처음 접하는 내용이었다. 다음은 한 작가가 산란계 농장에서 겪은 일화다. "살아있는 닭을 만지는 것보다 더 끔찍한 건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닭이 다치지 않게 다룰 수가 없다는 거였다. 번호표는 날개죽지 안쪽에, 사람으로 치면 겨드랑이쯤에 붙어 있었다. 번호를 확인하려면 날개를 붙들고 이리저리 뒤적거려야 했는데 그때마다 뼈가 부러졌다. 놓치지 않기 위해 힘을 주어 잡기는 했지만 뼈가 부러질 만큼 세게 붙잡지는 않았다. 새가 원래 그런 건가? 하지만 프라이드 치킨을 먹을 때도 이렇게 쉽게 뼈를 부러뜨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는 산란계 농장에서 닭이 골다공증에 걸리기 때문이다. 산란계는 1년에 300개 정도의 알을 낳는데, 자연상태의 닭이 낳는 알의 수를 여러배 초과한 양이라는 것이다. 손아귀에서 뼈가 '토각' 부러지는 느낌을 한 작가는 한동안 잊지 못했다고 적었다.

'한동안'이란 말은 '언젠가는' 잊었다는 의미이다.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살육을 그저 '일'로 인식했다. 양돈장에서 병든 돼지 한마리가 죽은 날, 함께 일하는 '아저씨'와 돼지 시체를 분뇨장으로 옮기는 장면이 책에 나온다. 분뇨장에 가는 이유는 시체를 똥에 섞어 썩히기 위함이다. 그 발상도 놀랍지만, 아저씨가 불평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일하는 사람이 하필 적게 나온 날이라, 무거운 시체를 옮기는 데 힘이 들었던 것이다. "썅 간나 새끼! 뒈질라면 내일 뒈지지!" 뜨악했던 한 작가는 어느날 아저씨가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모습을 본다. "밥을 먹일 때면 고양이 집 앞에 의자를 끌어다놓고 고양이가 접시를 다 비울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 고양이에게 그토록 정성을 들이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 차이를 만드는 지점이 정확히 어디일까 궁금해졌다."

한 작가는 이런 모순이 자신에게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개에게 소독약을 쏘는 대목이 담긴 일기를 정리하다가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1인칭 시점의 글인데도 3인칭처럼 묘사해 놓았다. 다시 읽어보니 유난히 자주 반복되는 문구들이 눈에 띄었다. '나도 모르게',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언가 나를 사로잡았다' 등등. ... 재미있는 건 부화장에서 병아리를 버릴 때의 일기에는 이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는 거다." 닭, 병아리, 돼지를 죽일 때도 마음이 괴롭기는 했지만, 자기 부정으로 이어질 만큼 강렬한 부끄러움은 없었다고 한 작가는 쓴다. 그 차이를 작가는 '나는'이라는 주어와 조사에서 찾는다. "닭의 목을 비틀 때도 돼지에게 매질을 할 때도 동사 앞에 언제나 당당하게 '나는'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 작가의 시선이 고기를 기르고 잡는 노동자에게도 향해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도살장으로 가는 한 돼지의 눈. 출처 : 서울 애니멀세이브 트위터

양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질이 바뀐다는 '양질전환의 원리'라는 것이 르포에도 적용됐던 모양이다. 한 작가는 '노동자'라고 뭉뚱그리기 쉬운 일하는 자들 사이의 관계에도 세밀한 시선을 들이댄다.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차별 대상은 외국인 노동자이다. 한 작가가 자돈 농장 동료인 캄보디아인 쌍남과 동갑이란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일화. "둘이 동갑인 걸 들켜서는 안 돼. ... 그러다 우습게 보인다." 같은 사육 농장이지만 돼지, 소, 닭 농장 사람들은 개 농장 주인과 일꾼을 무시한다. 돈 없을 때나 하는 잡일이라는 것. 지금도 그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다만 이런 차이는 훅 와닿는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있는 데 복 부장이 대뜸 내게 물었다. “야, 너 그거 니 이빨이야?” ... 그때까지 나는 내가 매번 제일 먼저 식사를 마치는 이유가 단순히 먹성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아저씨들은 이빨에 생긴 문제는 참을 수 있을 만한 불치병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서 좀처럼 병원에 가려고 하질 않았다."

사육장 르포의 결과 역설적으로 사육장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도 눈에 보인다. 한 작가는 개에게 먹이는 짬(음식 쓰레기) 수거 업무를 하다 짬을 얻기 위해 운전사, 업자들이 지역별로 '권리금(프리미엄)'을 납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히 강남은 프리미엄이 비싸서, 강북이 1000만원이면 강남은 3000만원에서 5000만원 꼴이란다. 짬 수거 업무를 담당하는 '김 실장'의 말은 이렇다. "왜긴 왜야? 짬밥 질이 좋으니까 그렇지. ... 최고는 호텔 짬밥이야. 호텔이 어떤 데야? 최고 재료로 최고의 요리사들이 만드는 데 아냐? 질만 좋아?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비싼 식당 가면 돈 아까우니까 안남기고 다 먹지. 돈 있는 사람들은 안그래. 그러니 양도 많지." 이런 구절에 이르면 혹시 강남 짬을 먹고 자란 개고기 값이 더 비싼 것은 아 닌가 의심이 드는 것이다.

어느 개 농장에서는 개의 사체를 개의 먹이로 사용했단다. 출처 : 케어

이 모든 서술의 구조는 단순하다. '일하기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힘들었다, 그만뒀다'로 요약되는 스토리이다. 그러나 나쁜 이야기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저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좋은 서사'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내게 서사란 시간의 축 위에서 '사건', '진실', '응답'이라는 기능소가 차례로 전개되는 담화의 구조물을 뜻한다. '인물에게 사건이 벌어졌고, 그 사건을 통해 진실이 산출되며, 인물은 그 진실에 응답해야만 한다.' 이 과정을 거쳐 인물은(그리고 우리는) 돌이킬 수 없어질 것이다." 한 작가는 '채식주의자'가 되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다만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는 당연히 정확한 숫자가 필요하다. ... (하지만) 일련의 숫자에 사회의 현실을 대변하는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숫자들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말하자면 '냄새를 맡아볼 의무'가 있다"고 적는다. 냄새를 맡은 결과 그는 육즙이 떨어지는 삼겹살 한 점과 자신 사이에 한치의 환상도 남아있지 않게 됐다고 했다. 환상의 빈 자리에 대신 깃든 것이 살육의 현실이다.

그러한 변화는 '나는'이라는 말의 불균형한 사용에서 못지않게 아주 사소한 발견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충남 강경 자돈 농장에서 한 작가는 깊이 15cm, 폭 25cm의 작은 배수로 때문에 크게 고생한다. 똥이 빠져나가기엔 좁았던 데다, 배수구가 배수로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있어서 오줌이 자꾸 흘러넘쳤기 때문이다. 반면 강원도 횡성의 비육 농장에서는 수월하게 일을 처리한다. "콘크리트로 된 바닥의 절반은 막혀 있고 나머지 절반에는 길이 1m 폭 5cm의 길쭉한 구멍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뚫려 있다. 따라서 청소할 때는 플라스틱 삽으로 평평한 바닥에 쌓여있는 똥을 구멍이 있는 쪽으로 밀어내기만 하면 됐다." 비슷한 말을 한겨레 기자들의 노동 체험 르포 <4천원 인생>에서도 봤다. "빈곤 노동에 대한 대안을 묻자 임인택 기자는 ‘노동자들이 편하게 공장에 출근할 수 있도록 통근 버스를 마련해주는 것’이라 말했다. 그 버스 안에서 노동자들은 쉬고 생각하고 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르포가 이야기 구조를 짜기 어려운 장르라던 장 작가가 책의 한 켠에 적은 문장은 이러하다. "르포는 픽션으로 치면 모험소설과 비슷한 구성이고, 1인칭 화자는 주인공인 모험가 역할을 한다. 그는 위험한 현장을 찾아가거나 무모한 실험을 벌인다." 그렇지. 모험이 시작할 땐 이색적인 세계와 타자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끝에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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