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평범한 살인 사건
목소리가 고운 메추라기
Aug 14,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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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다시 읽고 싶은 긴-이야기 코끼리, 코끼리의 번역노트>에 연재된 글입니다. 링크🐘

💔가장 평범한 살인 사건

대학 라크로스팀 선수로 동료를 위할 줄 알던 이어들리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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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힘들고 지친 하루를 마치면 가장 친밀하고 편안한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요즘 유행하는 MBTI검사의 I(내향형)이건 E(외향형)이건 마찬가지 아닐까요. 나를 편안하게 하고 기분 좋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힘든 삶을 계속 살아갈 힘이 되어 줍니다.

하지만 이렇게 친밀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가장 위험한 사람으로 돌변하기도 합니다. 친밀한 애정이 무서운 집착과 소유욕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오늘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실제 벌어지고 있는 평범하고 두려운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만능스포츠맨이자 예의 바르고 밝은 청년이었던 조지 휴글리. 그는 폭력적인 음주 습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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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난 이어들리 러브는 이름처럼 사랑스러운 대학생이었습니다. 가톨릭계 사립여고를 졸업하고,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토머스 제퍼슨이 창립한 버지니아대학(UVA)에서 정치학과 스페인어를 전공했습니다.

러브는 늘 활기가 넘쳐 주위 사람들에게 늘 힘이 되는 친구였죠. 그는 운동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고등학교 때 라크로스와 필드하키 대표로 활동했습니다. 라크로스는 기다란 스틱을 이용해 공을 던져 주고받으며 상대 골대에 넣는 게임인데, 경기장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거친 몸싸움을 해야 하는 스포츠 종목입니다. 대학에서도 라크로스팀에서 활약했습니다.

러브는 뛰어난 운동선수였고, 친구와 팀 동료들도 그녀를 칭찬했습니다. 실력이 뛰어났지만 거만하지 않았고, 동료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몰래 선물을 주며 응원하는 착한 심성의 소유자였지요.

그런 러브에게도 동갑내기 남자친구가 있었습니다. 조지 휴글리 역시 1987년에 태어났고 사립 남고를 졸업했습니다. 미국 라크로스 대표팀 선수로도 뽑혔고, 미식축구도 곧잘 했던 뛰어난 운동신경의 소유자였죠.

초등학교 시절 휴글리의 이웃에 살던 한 남성은 “휴글리는 아주 매력적이고 예의 바르며 밝은 소년이었고, 그의 부모들도 훌륭했다"고 말했습니다. 휴글리가 8살 때 부모는 이혼했지만, 재력이 풍부한 아버지 덕분에 사립학교 진학할 수 있었죠.

러브와 휴글리는 대학 입학 후 만나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그러다 둘은 정식으로 교제하고 2010년 봄 무렵까지 2년 가까이 사귀었죠. 남학교와 여학교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던 두 사람이 대학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다면 서로를 얼마나 아꼈을까요. 하지만 둘의 관계가 항상 안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지 휴글리와 이어들리 러브는 대학 입학 후 만나 연인으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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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글리는 예전부터 알코올과 관련된 문제를 겪었습니다. 2007년, 플로리다에 있는 가족 별장에서 미성년자 신분으로 술을 소지해 재판을 받았고, 2008년 대학 입학 후 공공장소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피우고 체포에 저항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경찰은 당시 휴글리를 제압하기 위해 테이저건을 쏘아야 했습니다. 그는 징역 2개월에 집행유예 6개월을 선고받았고, 벌금과 사회봉사까지 명령받았습니다. 또 약물 중독치료 프로그램도 이수해야 했죠.

휴글리는 대학을 대표하는 스포츠팀의 선수였지만, 술에 취해 처벌받았다는 사실을 학교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휴글리에겐 당시 이런 일을 학교에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솔직히 자신이 처벌받은 사실을 알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음주 습관을 고쳤다면 그는 평범한 대학 생활을 잘 마무리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러브의 평범한 삶도 파괴했습니다.

4학년이었던 두 사람이 졸업을 몇 주 남기지 않은 2010년 5월10일 새벽 2시15분쯤, 경찰은 대학 인근의 러브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했습니다. 그녀의 룸메이트는 러브가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줄 알고 911에 신고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찰이 침대 위에 엎드려 있는 러브의 모습을 발견했을 땐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그녀는 피로 흥건해진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었습니다. 몸을 바로 눕히자, 멍 들고 상처 입은 러브의 얼굴이 드러났습니다. 외부 충격에 의한 부상이 분명했습니다. 러브는 현장에서 사망 판정을 받습니다.

유력한 용의자는 휴글리였습니다. 휴글리는 러브의 아파트 인근에 살고 있었습니다. 러브가 사망하기 전 휴글리와 다투는 듯한 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경찰은 곧 휴글리를 조사 했습니다. 휴글리는 자신이 잠겨있던 러브의 방을 발로 차고 들어갔고, 말다툼을 벌이다 “그녀의 몸을 잡아 흔들었고, 그녀의 머리가 계속 벽에 부딪혔다"고 진술했습니다.

조지 휴글리(오른쪽)는 결국 체포돼 재판을 받게 된다. 건장했던 휴글리는 수감된 뒤핼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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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비극을 막을 기회는 없었을까요. 경찰은 러브가 숨진 뒤 사건 현장은 물론, 러브와 휴글리가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와 이메일을 확인하고 주변을 조사했습니다.

사건의 징후가 있었습니다. 휴글리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던 러브에게 집착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휴글리는 러브와 헤어진 뒤 라크로스팀 동료가 ‘러브와 키스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잠들어 있던 동료를 폭행하기도 했습니다.

폭행은 러브에게도 향했습니다. 휴글리가 러브를 목 조르거나 때리는 모습이 주변 사람에게 목격됐고, 러브의 사망 몇 달 전 열린 파티에서 3명의 팀 동료가 러브에게 달려들던 휴글리를 떼어놓은 일도 있었습니다. 사망 며칠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습니다. 휴글리는 종종 러브를 협박했습니다. 휴글리가 보낸 메시지 중 “널 죽였어야 했다"는 내용이 발견됐죠.

수많은 폭력과 협박이 일어나는 중에도 러브는 밝은 모습을 보이면서 참아 왔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그저 평범한 여대생의 모습으로 생활했던 것이죠. 술에 취해 폭력을 저지르는 휴글리를 제지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소속 스포츠팀 선수의 생활 태도를 지도 관리했어야 할 지도자나 학교 관계자들도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러브가 겪은 고통이나 휴글리의 폭력적인 음주 습관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휴글리의 변호사는 그가 체포된 뒤 “러브씨의 죽음은 의도적인 것이 아닌 비극적 결과를 낸 우연한 사고일 뿐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의도한 일이 아니다'라는 흔한 변명이 또 등장하는 것입니다.

러브는 어쩌면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하고 졸업할 때까지 조용히 참고 기다리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해 살아가는 평범한 삶의 기회를 빼앗겼습니다.

이어들리 러브가 사망한 뒤 열린 추모식. 그녀를 기억하는 학생과 지인들이 촛불을 들고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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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글리는 2012년 결국 2급 살인 혐의에 대해 징역 23년형이 선고됩니다. 러브의 유족들은 휴글리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승소합니다. 학교와 스포츠팀의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이후 취하합니다. 유족들은 가정폭력, 특히 교제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활동을 지원하는 ‘원러브' 재단을 만듭니다. ‘러브'라는 가족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입니다. 평범한 여대생 러브는 너무 평범하게 살해당했지만, 그녀의 이름은 특별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녀를 다시 살릴 수는 없지만 다른 죽음은 막을 수 있을까요. 러브의 사망 후 열린 추모 집회에서 존 캐스틴 버지니아대 총장은 “러브의 죽음이 어떤 여성도, 어떤 누구도 우리 이웃과 이 국가에서 안전을 두려워하거나 어떤 이유로도 폭력을 경험할 필요가 없는 계기로 이어져야 한다”는 추모사를 남겼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2000여명이 모였습니다.

하지만 러브와 같은 죽음은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러브의 죽음은 충격적이었지만 특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 사법 당국의 통계를 보면, 2021년 살해되거나 상해치사 등으로 숨진 여성 피해자 4970명 중 34%가 애인 등 친밀한 파트너에 의해 숨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1만7970명의 남성 살인 피해자 중 오직 6%만 친밀한 관계의 파트너에 의해 숨진 것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전 세계적으로 매일 137명의 여성이 가족이나 친밀한 파트너에 의해 살해당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1년에 5만 명이 넘는 여성이 남편, 애인 등에 의해 살해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러브의 죽음은 매일 같이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가장 평범한 살인 사건 중 하나였을 뿐이죠. 너무 보편적이고 매우 흔한 비극인 셈입니다.

밝고 아름다웠던 이어들리 러브.

🐘참고기사

  1. A Deadly Romance: The Lacrosse Killing, By Jill Smolowe | May 24, 2010 | People
  2. Prosecutors: George Huguely e-mail to Yeardley Love said, ‘I should have killed you.’, By Mary Pat Flaherty and Jenna Johnson | Feb 8, 2012 | The Washington Post
  3. Why did Yeardley Love have to die?, By May 11, 2010 | Sports Illustrated
  4. The Silent Epidemic of Femicide in the United States | March 10, 2023 | Sanctuary for Families
  5. UVA Men's Lacrosse Player Charged with Murder of Fellow Student Athlete, By Sandi Cauley | May 3, 2010 | CBS 6

코끼리의 번역 노트는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사건 사고의 숨겨진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곳곳에 숨은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여러분과 다양한 영감을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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