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좋아'의 단단함
코끼리 사생팬 팬더곰
Mar 13,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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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맨 이말년, 그에게 꽂혔던 두번의 계기.

침착맨 이말년의 '오히려 좋아'라는 말이 곳곳에서 들린다. 최근 술자리에서도 나는 '오히려 좋아'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다. 왜 이 다섯 글자에 꽂히게 되었는지 썰을 좀 풀어보겠다.

20대 초반에는 '삐딱하게 보기'가 멋있어 보였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무조건 비판 거리부터 생각해봤다. 돈, 명성, 가족, 안정, 재벌, 기업의 착한 행보, 사회에서 신뢰도를 가지고 있는 언론과 기관, 그럴듯한 말들 등 어떤 주제가 나와도 그것에 대한 비판 거리는 널려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쉽게 하는 말에 나는 한번 더 생각해봤다는, 지적 허세를 부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삐딱하게 보기'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었던 것 같기도.

실제로 삐딱하게 보기는 글을 쓰거나 기사를 쓸 때 매우 필요한 기술이다. 그 예시는 굳이 들지 않겠다. 너무 많이 들어봤을 것 같아서다.


기자가 된 지 올해로 8년차이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이 '삐딱하게 보기' 기술이 조금 지겨워졌다. 비슷한 주장을 비슷하게 비판하고, 나 역시 그렇게 손쉽게 쓴 글이 있었다. 주변에도 현상에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하고, 무언가 해보자고 하면 안 되는 점부터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판을 해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환경이었다. 비판을 잘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는 너무 많았다.

몇 년 전부터 퇴사 열풍과 재테크 열풍이 불면서 사람들은 다시 자기계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대학생활 때 코웃음을 쳤던 자기계발 코너에 오래 서있었다. 자기계발의 핵심이 뭔가. 긍정긍정긍정이다. 나는 할 수 있고 자기계발을 해서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이 노력이 좋은 쪽으로 나를 데리고 갈 것이라는 긍정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다.

시니컬하고 비판적인 내용에 환장했던 나는 이제 다시 긍정에 환장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건 이래서 안되잖아'라든가 '~는 이래서 안좋아' 등의 내용으로 흘러가면 무언가 마음이 불편했다. 'NO'를 외치던 내가 왜 'NO'를 외치는 사람들이 불편해진 걸까.


그렇다고 그냥 처음부터 무조건 'YES'만 외치는 게 멋져 보이진 않았다. 순진무구한 태도가 멍청해 보이는 건 여전했다. 내가 꽂힌 건 어떤 현상에 대한 부정적인 면과 비판 지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 '내 주변에 이런 문제를 겪은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해결했어'라고 풀어가는, 비판을 한번 더 꼰 긍정이었다.

그걸 간파한 게 '오히려 좋아'다. 오히려 좋아는 무조건 '좋아'와 다르다. 문제에 맞닥들인 상황에서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오히려 좋아다. 그러니까 한번 이미 '삐딱하게 보기'를 거친 후, 다시 한번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좋아의 정신이다. 정(正)과 반(反)을 알고 나서 합(合)으로 나온 거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할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들어 회사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다면 '회사가 다 그렇지'하면서 욕을 할 것이다. 만약 회사에서 좋은 일만 있고 돈도 많이 주고 안락하기만 했었다면 재테크를 공부할 계기가 있었을까? 회사가 만족스럽기만 했다면 사람들이 따로 브런치를 개설해 글을 쓸 계기가 있었을까? 오히려 좋다. 문제를 만났을 때 비판만 하고 반대만 외치는 게 아니라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태도다.


이전에도 침착맨 이말년의 말에 완전히 꽂혔던 적이 있었다. 또 다른 문구는 "못하면 되잖아?"였다.

2020년 1월에 올라왔던 딩고 프리스타일 유튜브의 'EP.03 설 문안 인사 드리러 팔로알토, 침 콰이엇(침착맨)을 찾아간 뱃사공! 그의 고민은...?! I [월 300의 사나이 : 뱃사공] 설날 특집 1편 : 국힙 상담소'이라는 영상을 봤을 때다.

https://www.youtube.com/watch?v=DZqrYUnTqaA

딩고의 '월300의 사나이'에서 래퍼 뱃사고의 상담을 들어준 침착맨.

당시에도 일의 속도가 안 나왔고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였다. '우울하고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라고 스스로 생각될 정도였다. 왜 그럴까 생각하면서 우연히 보게 된 영상이었다.

일의 속도가 안 나왔고 일하기 싫어하는 상태가 계속됐던 이유는 '이제는 잘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요즘 '완벽주의의 함정'과 같은 심리학적 설명들이 자주 나와 식상한 이유이긴 하지만, '완벽주의'라는 말은 오히려 나와 거리가 있는 말 같아서 안 와닿았던 게 사실이다.

굳이 완벽주의를 추구해서 아무것도 못했다기보다, 기존에 내가 하던 것보다 '잘해야 될 것 같으니까' 하기 싫어지는 거다. 어느 정도 연차도 쌓였으니까 일을 잘해야 될 것 같고, 또한 일에 진심이고 진지하니깐 당연한 감정이다. 이말년 왈, 그러니까 더 잘해야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기만 하지 말고, 그냥 좀 못해보라고.

내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그냥 일을 '하는 것'에 의의를 두자는, 그 식상한 다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쓰면서도 마음속으로 '그래도 잘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함께 들지만, 그냥 좀 못해보는 것, 그 말이 나에겐 필요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좋아'와 '못하면 되잖아?' 두 가지 말을 사용하면 멘탈 건강이 아주 단단해져 버릴 것 같다.

이 글은 미디어오늘 정민경 기자의 브런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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