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의 편도 아닌, 기생충
정 많은 이구아나
Jul 14,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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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을 스포하는 글입니다

작년 이맘 때쯤 본 '기생충'이 1년 동안 해외 영화제에서 온갖 상을 휩쓸었다. 당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같이 본 친구에게 "우와 재밌다"라는 말을 한 다섯 번 정도 하다가 "나래이션으로 결말을 정리해버린 부분은 좀 아쉽다. 그치?"라는 말을 건넨 뒤, 마지막에는 "근데 뭔가 찝찝해. 마음 둘 데가 없어. 으아 이상해"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재밌긴 재밌는데 영화를 맺는 방식이 아쉬웠고 궁극적으론 왠지모를 '찝찝함'까지 안겨주어 나는 왓챠에서 이 영화에 별점 4개(5점 만점)를 주었다. 근데 국내외 유명 평론가들이 엄지척 극찬 세례를 퍼붓는 모습을 1년간 봐오면서 이런 '걸작'에 별점을 4개 밖에 주지 않은 나 자신에게 민망함을 느꼈다. 혹시나 기회가 온다면 영화관에서 '기생충'을 한 번 더 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기생충-흑백판'이 개봉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영화관에서 같은 영화를 두 번 보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이 있는 내가 기꺼이 1만2000원을 내고 '기생충-흑백판'을 예매했다. 벌써 초여름이라도 온 듯 습한 공기가 내려앉은 토요일의 한가한 정오, 코로나 여파로 텅 비어있었던 극장에 앉아 '다시 한 번' 기생충을 감상했다.


출처: 네이버 영화

한 번 더 봤지만 '찝찝함'은 여전했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찝찝함을 느끼게 하는 게 봉준호 감독의 목적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로 나는 감독의 의도를 그대로 흡수해버린 충실한 관객이 아니었을까. 감독의 의도를 정확하게 구현해냈고 관객 역시 그것을 느꼈다면, 그 자체로 기생충은 극찬을 받아 마땅한 탁월한 영화임에 틀림 없다. 지금부터 내가 왜 '찝찝함'을 느꼈는지, 그것이 왜 봉 감독과 이 영화의 '탁월함'인지 정리해보려 한다.

뭐든 확실한 걸 좋아하는 나는, 모 아니면 도 A 아니면 B 착하거나 나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좋거나 싫거나, 무엇이든 한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습관이 있다. 100 대 0까진 아니어도 59 대 41 정도로 한 쪽을 '편애'할 수 있다면 괜찮기에 극단적인 성격까진 아니지만 어쨌든 안심하고 마음을 둘 곳을 늘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찌된 게 50 대 50이다. 사람들은 기생충을 보고 보통 계급격차의 처연함을 절절히 느끼며 기택(송강호 역)의 가족에게 강한 연민을 느끼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동익(이선균 역)의 가족이든 기택의 가족이든, 그 누구에게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기택네는 그 나름대로 짜증을 유발하는 집단이었고 동익네 역시 밥맛이었다.


출처: 네이버 영화

동익은 성공한 벤처 사업가다. 주변엔 온화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모의 아내 연교(조여정 역)와 1남1녀를 두고 있다. 아무리 회사 일이 바빠도 아들 생일을 위해 시간을 내어 캠핑을 갈 수 있는 자상한 아빠다. 아내의 의견과 결정을 존중하는 태도로 대화를 잘 나누며 가끔은 에로틱한 로맨스도 나눌 수 있는 다정한 남편이기도 하다. 자녀 일이라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수 있는 모성애를 지닌 연교도 상식적인 인물이다. 가정교사나 가정부, 운전기사를 '대놓고' '무리하게' 착취하지 않는다. 설사 해고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상대에게 굴욕을 안겨주지 않고 조용하고 부드럽게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클리셰와 달리 지하 벙커 딸린 저택에 사는 거부(巨富)치곤 모범적인 사람들이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한진그룹이나 한화그룹 일가처럼 일탈과 무례함을 일삼는 절대악으로 그려지지만 기생충에서 그런 '과한 설정'은 볼 수 없다. 적당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동익과 연교 부부는 집에서 하인처럼 부리는 사람들과도 평온한 공존을 추구하며 소란스러운 갑질을 일삼지 않는, 비교적 훌륭한 부자의 원형이다.

선을 넘지 말아라

하지만 그들에게도 원칙은 있다. 선을 넘지 말라는 것. 혈기왕성한 운전기사가 차에서 섹스를 하든 상관은 없지만 '내 차'에서, 그것도 운전석이 아닌 '내 자리'인 뒤에서 했다면 그는 가차 없이 해고 대상이다. 운전기사와 세상 사는 농을 주고 받으며 킬킬 댈 순 있지만 사적이며 친밀한 교류는 거부한다. 언뜻 보면 밥 먹고 섹스하고 술도 마시는 '같은' 인간이지만 '다른' 부류이기에 '어울려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동익을 바라보는 기택의 심정은 복잡미묘하다. 일제 시대의 일본인 경찰처럼, 군부 독재 시대의 위정자와 같이 동익의 가족은 기택네를 대놓고 핍박하고 착취하고 고문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동익이 분노를 표출하고 봉기를 일으킬 정당화의 논리도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냄새를 혐오하는 동익을 향해 기택은 화는 낼 수 없다. 잘못은, 후각이 발달한 동익이 아니라 애초에 그러한 냄새를 갖게 된 기택의 것일 수 있어서다.

출처: 네이버 영화

그렇다고 해서 기택이 동익을 살해하고 그의 가족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동익이 어떻게 해서 부를 축적하게 되었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갖은 경제 잡지에서 '성공한 CEO' 특집의 표지에 등장하는 걸 보면 동익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아 부자가 된 재벌 2세는 아니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개인의 노력과 자유를 존중하고 또 장려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처절한 노력을 딛고 동익은 저택의 삶을 누리게 됐다. 그런 그가 다만 '반지하 냄새를 견디지 못했다는 이유'로, '죽어가는 가정교사의 목숨보다 자신의 가족의 안위를 더 챙겼다는 이유'로 운전기사의 칼에 맞아 살해 당하는 건 부조리에 가깝다.

이 때문에 관객은 피 흘리는 동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히어로물에서 정의로운 영웅이 악당을 처단하는 서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의 살해 행위와 죽음에 책임이 없는 상황에서 칼은 휘둘러졌고 사람들은 죽어나갔다. 부자와 빈자의 계급 격차가 만들어내는 냉혹한 현실에서 잉태된 '파괴적 분노'는 원인을 제공하지 않은 개인을 무차별적으로 향한 것이다. 영화 속 뉴스에서 이 사건을 '묻지마 살인사건'이라 명명한 것도 감독의 의도된 장치였을 것이다. 이것이 동익의 죽음을 지켜보며 내가 찝찝함을 느낀 이유다.

출처: 네이버 영화


기택은 빈자 중에서도 극빈층에 속하는 인물이다. 발레파킹, 택시기사, 운전기사, 대왕 카스테라 등 안 해본 일이 없지만 어느 것 하나 성공하지 못하고 아들 기우(최우식 역)에게 기생하며 사람이다. 기택이라는 인물을 관통하는 단어는 '계획'이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대사로 시작한 기택의 서사는 영화 말미에 "가장 완벽한 계획은 무계획"이라는 말로 이어진다. 계획을 세워도 번번이 실패하는 바람에 손에 쥔 것이 없어 계획할 힘조차, 의지조차 낼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독일의 문호 헤르만 헤세도 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에서'에 비슷한 문장을 적었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없는 아이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아."

지독한 가난은 기택의 가족을 극단적인 아노미 상태로 몰아 넣는다. 기우의 학력을 위조하기 위해 '사문서 위조'로 시작한 그들의 범죄는 점점 대담해진다. 아들과 딸이 동익의 가족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는 모습을 보고도 혼을 내긴 커녕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 아니라 나중엔 기꺼이 공범을 자처하기에 이른다. 아무리 가난이 그들을 '비윤리적' '탈법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들 정당화될 수 없는 수준이다. 그 와중에 주어진 '피자 포장박스 접기'라는 잡일 거리조차 책임감 있게 해내지 못한다. 수년 간의 노력이 좌절되고 처절한 가난을 살아가는 동익의 가족은 결국 게으름과 비윤리, 위법 행위까지 일삼는 최악의 상태까지 추락하는 것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가난은 반드시 사람을 피폐하게 하지만 모두를 범죄자로 만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기택의 가족은 동익이 그어놓은 선뿐 아니라 이 사회의 마지노선까지도 넘어버린다. 그들은 편법과 반칙으로 얻은 작은 이익을 지키기 위해 '같은 약자'를 향한 폭력도 서슴지 않게 된다. 원래 가정부였던 문광(이정은 역)과 근세(박명훈 역) 부부 역시 저택에 기생하는 '같은 기생충'임에도 동익의 가족은 그들을 적대시한다. 한 기생충이 다른 기생충을 박멸시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꽤 우스꽝스럽게 그려짐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웃지 못했을 것이다. 우습지만 웃지 못하는 이런 부조리함은 우스꽝스럽게도 현실에서 종종 일어나는 클리셰다.


부자와 빈자를 바라보는 봉준호 감독의 정확하고도 세밀하며 공정한 시선 덕분에, 관객은 연민과 분노라는 감정을 누구에게 쏟아내야 할지 모르는 감정의 카오스를 겪게 된다. 고로 '기생충'은 어쩌면 부자와 빈자, 그 누구의 편에 서지 않은 영화가 아닐까. '기생충'을 두고 단순히 빈부격차에 따라 고통 받는 빈자의 설움을 그려냈다고 뭉뚱그려 정의내려버린다면, 이 걸작을 만든 봉준호 감독이 어쩌면 서운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별점을 5개(5점 만점)로 정정하기로 했다. 20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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