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우크라이나 전쟁에 뛰어든 미국인 '박사'
목소리가 고운 메추라기
Apr 17, 2023  ·  

0

 

0

아래 글은 뉴스레터 <다시 읽고 싶은 긴-이야기 코끼리, 코끼리의 번역노트> S1E1입니다.🐘

[S1E1] 우크라이나 전쟁에 뛰어든 미국인 박사

Doc. Photographs by David Guttenfelder for The New Yorker

✏️

지난해 10월초 어느 일요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시내의 안드리브스키 데센트Andriyivsky Descent거리에 있는 야외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한 사람은 서른일곱살의 미국인, 일명 박사Doc였다.

나는 지난 3월,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의 키이우 공세를 반격하던 무렵에 이 거리에 있는 아파트를 임대해 지내고 있다. 당시 거리는 인적이 끊긴 상태였고, 산발적으로 들리는 포성과 공습 사이렌이 불길한 적막을 깰 뿐이었다. 지금 이 거리에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산책하는 커플들과 가족들로 붐볐다. 예술가들은 길에서 자신이 그린 유화를 팔았고, 트럼펫과 아코디언 연주자들이 팁을 받으며 공연했다.

박사는 잔에 담긴 네그로니(칵테일의 일종)를 홀짝걸렸다. 길게 자란 수염에 굵은 턱, 떡 벌어진 가슴을 한 그는 녹색 전술 재킷을 입고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삼지창이 새겨진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의 목엔 굵은 상처가 보였다. 노스 캐롤라이나의 술집에서 싸움을 벌이다 누군가 커터칼로 그어 생긴 상처였다. 식사를 마칠 때쯤 중절모를 쓴 노인이 우리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국제군단International Legion인가?”

딱딱한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로 그가 물었다. 나는 박사를 가리켰다. 노인은 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냥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네.”

박사는 술잔을 바라보며 머쓱해했다. 노인이 떠난 뒤, 사람들이 인정해주면 기분이 좋지 않냐고 물었다.

“이상한 기분이에요.” 박사가 대답했다.

박사는 20대에 해병대 기관총 사수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웠다. 미국에 있을 때 시민들이 다가와 '당신의 헌신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그는 늘 불편했다. 2011년 군 복무를 마친 뒤, 전쟁은 잊고 지내고 싶었다. “힘든 시간이었어요. 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가 말했다.

제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뉴욕시로 이사했다. 맨해튼에 있는 콜롬비아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제대 군인 지원제도를 활용해 그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부전공으로 언어학을 들었다. 구글에서 두 번 여름 인턴을 했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정규직으로 입사하게 됐다.

박사는 뉴욕 맨해튼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하는 동안 빅테크 기업을 부정적으로 보게 됐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환멸을 느꼈고, 나라를 극단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소셜미디어를 경멸하게 됐다.

지난해 1월 그는 구글에 사표를 냈다. 계획은 따로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 지 정해 놓은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가 떠올렸다. 그리고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박사의 생각에 그것은 꽤나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다음날 오후 그는 맨해튼 미드타운에 있는 우크라이나 영사관을 찾아가 보았다. 안내 데스크에는 새로운 소식이 있는지 알아보러 나온 우크라이나 이민자들로 가득했다.

일요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국제군단 창설을 발표했고, 전세계 시민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이 일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우크라이나만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다, 라고 젤렌스키 대통령은 강조했다. “이것은 유럽과, 유럽의 체제, 민주주의, 기본적인 인권, 국제 질서를 위한 법과 원칙, 평화로운 공존을 공격한 전쟁입니다.”

박사가 다시 우크라이나 영사관에 찾아갔을 때 한 관계자가 폴란드로 가라고 조언해주면서 그를 안내해줄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건넸다.

2주 뒤 박사는 의약품과 방탄복을 담은 더플백을 들고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영사관 관계자가 준 번호로 문자를 보내자 우크라이나 국경에 있는 모텔로 오면 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군인 출신이 분명해 보이는 여러 무리의 남자들이 모텔 주차장에서 어슬렁거렸다. 몇몇은 로비에 침낭을 폈다. 아무도 박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정보를 빼내기 위해 잠입한 스파이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들 편집증적으로 예민한 상태였다.

전날 러시아의 순항 미사일이 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우크라이나 야보리우에 있는 국제군단의 훈련소에 떨어졌다. 외국 용병들은 죽지 않았지만 수십명의 우크라이나 병사들이 숨졌다. 국제군단에 참여한 캐나다 출신 내 친구는 이 공격 당시 살아 남았다.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그 당시 현장은 “피로 물들었다”고 했다.

박사는 화물차 한 대가 오기까지 6시간 가량 호텔에 기다렸다. 운전사는 그에게 차에 올라 타라고 했다. “그게 전부였어요.” 박사가 당시를 떠올렸다. “‘좋아 될 대로 되라지’하는 심정이었어요.”

남미에서 온 용병 6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버려진 학교에 잠시 대기하다 결국 야보리우 기지에 자리잡았다. 수백명의 외국 용병들이 미사일 공격 당시 훈련소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폴란드로 돌아갔다.

내 캐나다 친구에게 듣기로는, 그들이 떠난 건 오히려 최선의 결과였다. 용병들 중 일부는 “합법적인 활동을 해왔고, 제대로 된 가치관을 가졌으며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상태였지만, 대부분은 엉터리였다. “총기 매니아”나 “우익 폭주족” “136kg에 달하는 전직 경찰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두 명이 텐트에서 실수로 총을 발사하기도 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규율 부재 상황은 “상당한 양의 코카인”이 발견되면서 더 극명하게 드러났다.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은 오히려 거름망 역할을 했다. “터프한 척 하던 남자들이 똥을 싸며 도망치는 모습이 정말 우스웠다니까.” 내 친구가 말했다.

박사가 보리우에 도착했을 때 더 많은 용병들이 전투병으로 지원했다. 국제군단의 본진은 우크라이나 육군 관할이었는데, 우크라이나 국방부 정보국인 G.U.R.도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용병을 모집했다. 박사는 G.U.R. 장교와 인터뷰한 이후, 브라질인, 포르투갈인, 영국인 등 13명으로 구성된 팀에 배치되었다. 그들은 키이우로 향하는 러시아 기갑 부대를 정찰하기 위해 북쪽의 수미Sumy로 향했다.

4월, 러시아군은 동부의 돈바스에 집중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북부에서 퇴각했다. G.U.R.은 박사와 그의 동료들을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라는 지역으로 보냈다. 전투가 격화됐다. 봄과 여름에 박사의 부대원 2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남은 인원은 집으로 갔다. 우리가 키이우에서 만났을 때, 그의 팀은 5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쪼그라든 팀의 모습은 전체 상황을 반영하는 듯 했다.

3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52개국에서 온 2만명의 사람들이 국제 군단에 가입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 무렵 키이우에서, 나는 전쟁에 동참하기를 열망하는 수많은 미국인과 유럽인들을 만났다. 기차역에는 그러한 용병들을 환영하기 위해 별실까지 마련됐다. 하지만 지금 국제군단은 몇 명의 대원이 근무하고 있는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2만명에는 크게 못 미친다.

많은 전투 경험이 있는 용병들도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약 700마일에 이르는 전선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무자비한 폭격이 대규모로 펼쳐졌다. 포탄이 쏟아지는 날이 계속될 수록 서구의 병사들이 겪는 어려움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겪었던 것과는 확연히 구별됐다. (그곳에선 화력에서부터 상대를 압도했다.) "일단 공격 받으면, 90%의 사람들이 감당을 못 할 거예요. 전투경험이 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사가 말했다.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그는 계속 싸울 것인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2주 후 그는 돈네츠크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그에게 같이 가도 되는지 물었다. 우크라이나군이 어떻게 전쟁을 수행하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종군기자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 전쟁의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전황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정부나 병사들이 올린 자료나 편집된 영상에서 비롯된 것이 전부였다.

G.U.R.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독립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박사를 따라 전선에서 동행취재를 할 수 있도록 허가해주었다.

Trapped in the Trenches in Ukraine By Luke Mogelson

Dec 26. 2022, The New Yorker

🐘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에 나선 해외 용병들은 국제군단이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국제군단의 특수 작전에 동행해서 쓴 이 기사는 잠시 평화가 찾아온 키이우의 한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국제군단에서 활약하는 미국인 용병인 일명 ‘박사’와 기자. 그들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노인의 모습은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진행될지 미리 짐작케한다.

-이야기는 이처럼 장면으로 시작된다. 장면과 장면이 이어지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영화 제작에 구체적인 장면을 그린 콘티가 필요한 것처럼 글로 쓴 이야기도 이런 장면 묘사가 필요하다.

-장면을 기본 단위로 이야기를 구성해나가는 것은 소설, 연극, 영화 등 이야기를 다루는 다양한 매체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장면이 없이는 캐릭터가 움직일 수 없다. 대화도 없고, 극적인 갈등도 만들 수 없다. 장면 묘사가 없이는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는 이유다.

-오늘 소개한 이 기사도 박사가 전쟁 소식을 듣고 우크라이나 영사관을 찾아가고, 폴란드를 거쳐 국제 군단에 합류하는 과정, 국제 군단 훈련소의 모습 등이 머릿속으로 구체적인 상황을 떠올릴 수 있는 정도의 장면으로 구성된다. 이후에는 실제 작전에 투입된 박사와 국제 군단 구성원들의 모습이 장면 단위로 묘사되어 있다.

-장면을 기본 단위로 한 글을 쓰는 것은 비단 오늘 소개한 장문의 기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기사의 도입부에 구체적인 장면을 제시함으로써 이후에 이어질 분석과 해설에 생생함을 더할 수 있다.

-아래의 기사는 지난 2월20일 뉴욕타임스에서 보도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을 다룬 기사의 첫 머리다. 한 열차가 우크라이나 교외를 가로지르는 장면으로 기사가 시작된다.

... 이어지는 뉴스레터 내용을 더 보려면 링크로 이동해주세요!

<코끼리의 번역 노트>는 '다시 읽고 싶은 긴-이야기 코끼리'가 엄선한 해외의 내러티브 논픽션을 소개하는 콘텐츠입니다. 곳곳에 숨은 이야기를 찾는 이들과 영감을 나눕니다.

좋아요

댓글 등록은 이 필요합니다.
아직 댓글이 없어요.
가장 먼저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