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일기] 소문난 잔치
밤이 무서운 알파카
Apr 14,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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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이름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였다. 수습기자 생활 중 손에 닿는 하나하나 신기하지 않았던 것이 없지만, 이번엔 더욱 그랬다. 신문과 TV에서만 보던 그를 만나는 것은 사뭇 색다른 일이었다. 내가 경영학을 전공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 회장과 롯데는 우리 경제를 이끌어 온 거대한 톱니바퀴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는 거인이었고, 내겐 저 높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존재였다.

롯데그룹 신 총괄회장은 여동생의 피성년후견인 신청에 따라 3일 오후 서울가정법원에 출두했다. 스케치를 하러 양재동으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지하 4층 주차장에 기자들이 바글바글했다. 빼곡하게 자리 잡은 카메라가 눈에 들어온다. 솔직히 신 회장보다 그들의 행동거지가 더 관심이 갔다. 힐끗힐끗 곁눈질한 그들은 단정해 보였다. 청바지에 헤진 잠바를 입고 머리가 삐죽 뻗쳐있는 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누가봐도 기자답지 않은 몰골을 한 탓(나만 그런 건 아니다!)에 이곳저곳 경비원들과 종종 실랑이를 벌이곤 했는데, 그들은 항상 기자증을 보여주어야 길을 터주곤 했다.

좌우지간 그들은 기자같아 보였다. 잘 빗은 가르마 머리와 딱 떨어지는 정장. 검정구두는 유난히 반짝거려 보였다. 숨을 크게 들여마시고 눈을 크게 떴다. 근사한 모습을 한 그들이 수습인 나에게 뭔가를 보여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후 3시40분쯤 신 회장을 태운 에쿠스 차량이 도착했다. 혹시 나만 현장에서 중요한 걸 놓칠까 조마조마했다. 등으로 긴장감이 스몄다. 손발에 땀이 찼다. 그러나 수많은 기자와 카메라에 둘러싸인 채 차에서 내린 신 회장이 여러 경호원과 수행원을 곁에 두고 모습을 드러낸 현장은, 그야말로 소문난 잔치였다. 먹을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신 회장도 그랬고 멋드러진 기자들도 그랬다.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걷는 그는 거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상속분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막장 드라마 같은 재판 내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유 모를 인상을 쓴 채(대부분 무척 화가 나 보였다) 떠밀려 다니는 기자들도 그리 빛나 보이지 않았다. (나를 포함해) 거기 있던 기자들은 왜인지 모두 '우르르' '우르르' 몰려다니기만 했다. 그리고 짜기라도 한 듯 각자 핸드폰을 꺼냈고 경쟁이라도 하듯 누군가의 뒤통수를 열심히 찍었다.

서커스 북소리가 나면 일단 쫓아가고 보는 게 인간의 본능이라던가. 한시간여 비공개 재판이 끝나고 5층에서 한 법원 직원이 “신 회장이 이미 다른 통로로 내려갔다”고 말하자 주차장으로 허겁지겁 뛰어내려가는 기자들을 보니 기자 역시 그 범주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신 회장 일행은 한참 뒤에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조심스레 내려왔고, 유유자적 자리를 떠났다. 그 과정에는 날카로운 질문도, 속 시원한 대답도 없었다. 거인도 없었고 본보기도 없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오랜 진리만, 있었다. 2016.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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