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리뷰] 기자들을 뜨겁게 만드는 책
밤이 무서운 알파카
Mar 19,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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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조갑제

수습기자를 막 뗐을 무렵 대규모 워크숍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전국의 공보판사와 기획법관들, 그러니까 법원에서도 손꼽히는 엘리트 판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규모가 어마어마한 자리였다. 가뜩이나 취재원이 두렵고 어렵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그들의 이름값에 깔려 한껏 긴장한 나와 달리 워크숍은 퍽 왁자지껄했던 걸로 기억한다. 취기에 무르익은 판사들은 흥에 취해 술게임을 하기도, 실없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거나 벌개진 얼굴로 결혼과 자녀 교육, 높아진 집값과 대출금을 토로하는 이도 있었다. 가까이서 본 그들은, 나처럼 고민 많은 직업인들이었다.

그 이후 법원 취재가 한결 가벼워졌던 것 같다. 막연히 부담스러웠던 판사들이 그제서야 보통의 얼굴들로 보였다. "판사 시절 내가 내린 판결이 옳았는지 아직도 의구심이 든다"는 어느 변호사의 말을 들었을 땐 내심 고개가 끄덕여졌다. 당연한 일이다. 판사도 인간이다. 여느 사람들처럼 망설이기도, 실수하기도, 때론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한다. 이 사실은 판사 본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유무죄의 갈림길에 설 때 판사들은 "어려울 때면 관용의 길을 가라"는 법언을 중얼거리곤 한다.

"...저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엉터리 재판 집어치우십시오! 죽어서 원혼이 되어서라도 위증하고 고문하고 조작한 사람들에겐..."

하지만 생애 마지막 순간, 세상에 저주를 퍼부은 치정살인범 오휘웅의 이야기를 그린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1986)> 속 판사들에게선 그런 관용도, 망설임도 찾을 수 없다. 시대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1974년 12월 정분을 나누던 여성 두이분의 남편과 두 아이를 무참히 살해한 '선화동 일가족 살해 사건'의 주범 오휘웅은 이듬해 1월 구속된 뒤 1976년 2월 사형이 확정된다. 주변에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들이 떠올린 오씨는 "약간 덜렁대지만 쾌활하고 누구에게나 붙임성 좋은" 서른 살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사건 당시 언론 보도

물증은 없었지만 자백이 결정적이었다. '나는 지금 인천 검찰청 5호실에서 뉘우침을 갖고 자술합니다..' 오씨는 "경찰의 무자비한 고문 때문이었다"고 재판부에 거듭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1979년 9월 형장의 이슬이 됐다. 오로지 '증언'만으로 한 생명이 말살된 것이다. 당시 판사들은 훗날 이 사건을 이렇게 떠올렸다. "기록상으로 유죄가 안 날 수 없었습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오씨의 태도와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

사형은 완벽한 증거인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흔적은 지워진다. 이 사건 관련 기사라고는 1975년 1월, 7월 짤막한 단신 몇 개가 전부다. 아무런 이목도 끌지 못하고 그대로 잊혀질 뻔한 오휘웅 사건은 그로부터 수년이 흘러 기자 조갑제를 만나 활자로 되살아난다. 우연히 듣게 된 오휘웅의 섬뜩한 유언이 베테랑 사건기자의 "직업적 호기심"을 건드린 것이다. 십수 년 간 경찰서를 누비며 고문 현실을 목격해온 기자에게 오휘웅의 유언은 꽤 솔깃한 취재 아이템이었을 것이다. 그는 1984년 9월 <물증 없는 사형집행> 기사를 보도한 뒤 보충취재를 더해 이 책을 썼다.

기자 시절 조갑제는 29살 어린 나이로 한국기자상을 수상하는 등 '민완기자'로 명성을 날렸다.

기자가 된 뒤 책을 접한 나로서는 기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 책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지 알 수 없다. 다만 기자들 반응은 알고 있다. 뜨거워진다는 것. 탐사보도 전문매체 '뉴스타파'의 김용진 대표는 "한국 언론사에 남을 탁월한 탐사보도"라고, '셜록'의 박상규 대표는 "장마철 방바닥처럼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책"이라고 치켜세운다. 기자들이 손꼽는 장면이 있다. 1심 증인들의 진술 자료를 읽던 저자는 오락가락하는 태도에 답답함을 느끼고 인천에 내려가 직접 그들을 만난다. 그런 뒤 12년 전 오휘웅이 걸었던 동네 코스를 한발짝 한발짝 걸으며 검찰 측 주장에 물리적 오류가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좀처럼 보기 힘든 '기자의 방식'이다. 아무리 대단한 기자도 인간인 이상 완벽할 수 없다. 취재에는 늘 빈틈이 있다. 알아도 메울 수 없다. 당연하게도, 기자도 보통의 사람들이고, 직업인이다. 하루하루 기삿거리에 허덕이고 데스크 호통에 전전긍긍한다. 특종과 승진에 목매며 쥐꼬리만 한 월급에 한숨 쉰다. 산처럼 쌓인 기사량에 취재는커녕 기사 쓸 시간도 빠듯하다. 이들에게 이 틈은 애써 외면하고, 애써 무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납득이 갈 때까지 집요하게 팩트에 매달리는 저자의 모습은 기자들에게 양가적 감정을 느끼게 한다. 당사자가 십수 년 전 죽어버린, (기자들이 보기에)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한 사건을 수개월, 수년에 걸쳐 취재한다는 것, 농담 같은 얘기다. '오휘웅'이란 이름이 지금도 기자사회에서 종종, 꽤 비중있게 거론되는 것은 주인공의 비극적 삶보다는 이를 취재한 저자의 직업적 태도가 보통의 그것을 훌쩍 넘어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 뒷면에 실린 오휘웅의 얼굴

오휘웅은 무죄였을까. 책은 의견은 아끼고 팩트를 보여준다. 저자가 "이 모순은 재판부도, 변호인도 지적하지 못했고 내가 찾아냈다"고 자신하는 '머플러'를 놓고 오휘웅과 두이분의 진술은 완전히 엇갈린다. 범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범행 도구이자 핵심 증거이지만 오씨는 자백 내내 머플러에 대해 잘 모르는 듯 지껄인다. 경찰이 불러준 것에 "맞다" "그렇다" 답할 뿐이다. 범행 당시 오씨가 끼었다는 장갑의 존재, "두씨가 남편을 죽이려 한 적이 있었다"는 시어머니 진술, 범인이라면 가능하지 않은 오씨의 사건 당일 귀가시간 등 유리한 증거가 수두룩 했으나 판결은 뒤집히지 못했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오씨가 "고문을 강단 있게 견디지 못하고 너무 빠르게 자백해버린 탓"이다.

이 가련한 사형수의 삶이 보다 비극적으로 다가오는 건 이 책의 구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오휘웅 이야기에 앞서 사형수들의 절절하고 황폐한 삶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그 모습은 진저리가 날 정도로 참혹하다. "끔찍한 살인 현장을 본 사람들은 사형 존치론자가 되고 처연한 사형집행을 목격한 사람들은 사형 폐지론자가 된다고 한다." 이 책 첫 문장처럼, 집행 현장을 직접 보기라도 한 듯 마음이 동한다.

사형집행이 자취를 감춘 지금이야 물론 그렇지만, 매년 스무 명 안팎 사형수가 죽던 그 시절에도 사형은 늘 베일에 쌓여 있었다. 사형제 유지 국가에선 흔한 일이다. 활자와 풍문으로 접하는 사형은 사형수를 물화시키며 인권 감각을 마비시킨다. 일부에서 "사형수를 수사, 기소, 선고한 이들이 집행현장에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사형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비된 감각이 일깨워질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올가미 부분은 그 수많은 목에서 베어 나온 지방성분과 피가 묻어 새카맣게 반들반들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매단 지 20분이 지나면 일단 시신을 끌어올린다. 사망을 확인한 뒤에는 다시 지하로 늘어뜨려 5분 이상 더 달아 두었다가 시신이 된 사형수를 풀어놓는다. 달려 있는 총 시간은 30분쯤이다.' 이런 구체적인 묘사는 담장 너머 사형수의 죽음이 우리와 같은 '인간의 죽음'임을 환기시킨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종종 사형제 폐지를 위한 근거로 소개되지만, 저자의 스탠스는 오히려 반대다. 초판 당시 사형제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던 저자는 2015년 재출간 머리글에서 자신이 사형존치론자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렇다. 기자로서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오판'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사형제가 아니라 팩트를 말하는 책이다. 목적은 뚜렷하다. 검경과 법원의 판단을 취재로 뒤집는 것. 사형제의 비인간성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다. 사족처럼 느껴지는 판결문과 녹취록 전문, 다른 사형수 사례들을 구구절절 끼워넣은 것은 독자를 위한다기보다 오히려 논리로 독자를 제압하려는, 유능한 기자 특유의 오기처럼 느껴진다. 여느 유능한 기자들처럼 저자 역시 사건 곳곳 보란 듯 존재하는, 빤히 어긋나 있어 바로잡지 않고선 도저히 지나치기 어려운 팩트들이 '눈엣가시'처럼 밟혔을 것이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는 요컨대 '의심'에 관한 이야기다. 의심의 대상은 검경의 수사, 법과 제도, 나아가 인간 이성으로 확장된다. 오휘웅 사건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강력반 형사들은 지역반 형사 탓으로, 검사는 경찰 탓으로, 판사는 미진했던 수사 탓으로 책임을 돌린다. '의심하지 않은 죄'에 관한한 기자들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가까이서 보면 그들도 보통의 얼굴들일 것이고, 책임 전가는 직업인의 본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본능은 어디까지 허락돼야 할까. 오휘웅이란 비극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과학수사와 인권이 고문과 사형을 밀어낸 시대, 오휘웅은 정말 사라졌을까. 그리고 거기에 '우리'의 책임은 없을까. 책이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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